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문단 편집) === 일본의 반응 === 이 전례 없는 강력한 공격이 가해진 이후 일본 군부가 보인 반응은 '''[[현실부정]]'''이었다. [[니고연구]]의 총책임자이자 일본 근대 물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화학연구소]]의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8&aid=0000180135|니시나 요시오(仁科芳雄)]] 박사[* 애초에 니고연구라는 명칭부터가 박사의 성씨 첫 글자를 딴 것이다. [[닐스 보어]]의 제자이기도 했다.]가 원폭 투하 다음날인 8월 7일에 히로시마에 도착하여 현장을 조사하고, 히로시마에 떨어진 폭탄이 원자폭탄임을 확인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멘탈붕괴]] 상태에 빠진 일본 군부는 진실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히로시마가 괴멸하면서 히로시마 안의 보고 체계는 아예 증발해버렸고, 피해 보고는 외곽 주변의 관찰부터 천천히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기의 피해 보고는 원거리에서의 열풍·열복사 등에 관한 것으로 "두껍게 입은 면옷으로 폭발 당시의 열기는 막을 수 있었다."라든가 하는, 아직 분위기 파악도 제대로 못한 것들이었다. 그동안 혹독했던 미군의 대공습을 뛰어넘는 엄청난 물건이라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부족한 정보를 모아도 해당 폭탄이 평범한 재래식 폭탄은 아니라는 점은 아무리 맛이 간 일본군이라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일본군]] 정보부에서는 그것이 원폭이라는 점을 파악하고 있었다. 당장 위의 니시나 박사의 히로시마 방문조사에는 정보부서를 담당하는 참모본부 제2부장이던 [[https://ja.wikipedia.org/wiki/有末精三|아리스에 세이조(有末精三)]] 중장이 동행하고 있었고 그는 니시나 박사로부터 이것이 원자폭탄임이 분명하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대본영은 여전히 '''[[현실부정|그럴 리가 없다고 일관하고 있었다]].''' 군령부 총장 도요다 소에무는 원자 폭탄의 존재를 인정하였지만 그 수가 적을 것이니 본토 결전 이행에 차질이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육군 대신 아나미 고레치카의 경우 아예 원자폭탄인지도 확실하지 않다며 원폭 투하 보고를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상층부는 [[현실도피]]&[[인지부조화]]에만 몰두하고 있었고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지도부는 항복과 관련된 적극적인 제스처를 취하지 않았다. 사실 일본에게 항복 의지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다. 이미 소련을 통한 대미 강화 협상은 진행 중이었고, 국체의 온존 및 약간은 온건한 방식으로의 강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당연히 이런 조건이 받아들여질 리는 없었다. 이미 연합국과 대일 참전을 약속까지 하고 독일 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소련군들을 동아시아 전선으로 이동 배치하고 있던 소련으로서도 대의적으로나 실리적으로나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원폭 투하 이후 군부와 정부가 모두 항복에 동의하고 있는 상황에서 천황제를 유지한다는 조건만 붙이고 싹싹 빌어보자는 화평파와, 연합군의 일본 점령을 최소한도로 단기간에 끝마쳐야 하며 무장 해제와 [[전범]] 재판을 일본이 직접 할 것이라는 조건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어이 없는 조건을 내거는 강경파가 서로 충돌하면서 항복은 지체되었고, 미국은 어쩔 수 없이 한 발을 더 투하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이 화평파와 강경파의 갈등은 이미 늦은 상태였다. 화평파가 입장을 확고히 정리한 것이 8월 7일 저녁이었는데, 군부가 꾸물거리는 바람에 항복을 결정할 최고전쟁지도회의가 8월 8일 열리지 못하고 8월 9일, 즉 나가사키 원폭 투하일에서야 열렸다. 즉 이들이 무슨 결정을 내리건 일본의 히로시마에 대한 대응은 너무 늦었던 것이다. 심지어 8월 9일 회의 중에 2번째 핵이 떨어질 때까지도 일본 지도부는 미국에게 더 이상 핵이 없을 거라고 아무런 근거도 없이 생각하고 있었다. 반면 하층부에서는 이미 소문이 다 퍼진 뒤여서 다음 공격 타깃이 어디냐는 불안감에 휩싸이고 있었다. 물론 보도 통제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히로시마의 주변 사람들은 모두들 선명한 버섯구름을 목격했고 히로시마의 피난민들을 보았다. 그리고 민간 보도는 통제되었을지언정 군 통신망은 여전히 살아서 작동하고 있었다. 일본 전역의 군 부대 장교들 사이에선 하루만에 히로시마에 무언가 강력한 폭탄이 터졌다는 사실이 자연스레 알려졌고 그 폭탄의 종류가 원자탄이라는 것도 금세 전파되었다. 이는 군부에도 대패닉을 일으켰다. 대표적으로 8월 7일 밤에 오사카에서 격추되어 포로가 된 전투기 파일럿 마커스 맥딜다의 사례가 있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일본측에서는 장군이 직접 포로 심문을 진두지휘했고,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일본도]]로 목을 치겠다며 칼끝을 목과 입으로 겨눴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요구한 대답은 히로시마에 떨어진 폭탄의 정체, 그리고 그 폭탄의 다음 타깃이었다. 일개 전투기 파일럿인 맥딜다에게는 그런 고급 정보 따위 없었고, 그는 대충 자신이 알고 있는 범주 내에서 원자력 에너지에 대해 설명한 다음 (일본의 포로 대우는 끔찍했기 때문에 대답을 안 했다면 언제 살해 당할지 알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추정으로 다음 타깃이 도쿄나 교토일 것이라고 답했다. 그와 별개로 히로시마의 생존자들 사이에서는 도쿄가 다음 타겟일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아래에 있는 것은 이 시기에 일본 관동 지방에 뿌려졌던 미군 삐라다. 정황상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 이후-나가사키 원폭 투하 전인 8월 8일 오후에서 9일 오전 정도인 듯하다. [[파일:14-2-1.jpg]] [[파일:14-2-2.jpg]] >'''일본 국민에게 고함!!''' > >'''"즉시 도시에서 대피하시오"''' > >이 삐라에 쓰인 내용은 매우 중요한 것이므로 주의하여 잘 읽으시기 바랍니다. > >일본 국민들은 지금 중대한 시기에 직면해 있다. [[연합국|연합군]] 수뇌부는 [[포츠담 선언|삼국공동선언]]에 의거한 13개조로 이루어진 관대한 조항을 제시하여 무익한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나 [[대본영|일본 군부]]는 이를 무시하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소련]]은 일본에 [[만주 전략 공세 작전|선전포고를 하였다]]. [[미국]]은 현재 몇 명을 희생시킬지 모르는 무서운 원자폭탄을 발명하여 [[리틀 보이|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이 원자폭탄은 단 한 개만으로도 그 거대한 [[B-29]] 폭격기 2천대가 한 번에 투하할 수 있는 수준의 폭탄의 위력에 필적한다. 이 무서운 사실은 [[일본인|여러분]]은 히로시마에 폭탄 한 개가 떨어졌을 때의 상황이 [[지옥|어땠는지]]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익한 전쟁을 지속하려는 군사상의 모든 것들은 무서운 원자폭탄에 의해 파괴된다. 미국은 이 원자폭탄을 여러 개라도 쓸 준비가 되었으며 여러분들이 이 전쟁을 끝마치기 위해 [[쇼와 덴노|천황 폐하]]께 청원할 것을 바라는 바이다. [[해리 S. 트루먼|미국 대통령]]은 여러분들에게 요구한 13개조로 이루어진 관대한 조항을 신속히 받아들여, 평화를 사랑하는 새로운 일본의 건설을 종용하는 바이다. 따라서 일본 국민 여러분은 즉시 무력저항을 중지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미국은 단호히 원자폭탄을 비롯한 우수한 무기들을 [[몰락 작전|사용하여]] [[태평양 전쟁|이 전쟁]]을 [[총력전|신속하고 강제적으로]] [[일본의 항복|종결]]시킬 것이다. > >'''"즉시 도시에서 대피하시오"''' 한편 일본 군부는 [[미국]]이 7월에 [[뉴멕시코]]에서 핵실험에 성공한 뒤 v600번대 콜 사인을 가진 소규모의 B-29 부대가 티니안 섬에 배속되었다는 정보를 감청으로 알고 있었다. 단지 콜 사인만을 알 수 있었고, 그 부대가 특수한 임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아냈지만, 원자폭탄 투하 임무를 띠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원폭 투하 당일 에놀라 게이가 출격한 사실도 알고 있었고, 에놀라 게이가 히로시마 상공에 접근하기 1시간 전에 기상 정찰을 위한 또 다른 B-29가 히로시마 상공을 정찰한 것도 알고 있었으나 대피 경보를 내리지 않았다. 원자폭탄의 역사를 다룬 그래픽 노블 트리니티(서해문집 출판)에서는 일본의 대공 부대는 [[안전불감증|대규모 폭격에 너무 익숙해져서 비행기 몇 대에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고 설명되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